회사

검색
  • IMGURU

빈 서판(Blank Slate)

빈 서판(Blank Slate)

인간의 본성은 타고나는가



    빈 서판은 깨끗이 닦아낸 서판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빈 서판은 인간의 마음은 어떤 고유한 구조와도 무관하며, 사회나 그 자신이 그 위에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새겨 넣을 수 있다는 개념이다. 즉 백지라는 의미인데 이는 인간의 마음을 본성(유전)과 양육(환경)이라는 두 가지 대립주제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양육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이론이다. 이 이론은 학부생 시절 발달심리학 수업에서 한번 접했던 터라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번은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던 책이여서 이 책을 읽게 될 때에는 반가웠다. 하지만 책의 두께만큼 책의 내용 또한 쉬운 내용이 아니였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작가의 논지를 확인하는 수고를 반복해야 했다.


    처음에는 본성과 양육 두 가지의 대립 주제 중 한편에 서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읽다보니 인간 본성을 금기시 여기고 양육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판도에서 인간의 본성, 유전도 중요하며 이를 둘러싼 도덕적, 정치적 오해와 불안을 벗겨내는 책이였다. 대중들에게는 마음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낭만적으로나 받아들이기 좋다. 그에 반면 유전적 선천성을 강조하는 주장은 불평등이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위험을 갖고 있어 많은 비판과 지탄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면 인간은 한결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라고 체포흐의 말을 인용하며 본성의 중요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했다. 또한 이런 논쟁에서 과학의 역할은 논쟁을 용해하는 것이 아니라 절충을 확인하는 도구이며 이를 통해 인간의 집단적 선택이 보다 현명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랬다.


    책은 총 6부에 걸쳐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1부에서는 빈 서판의 개념과 20세기 전후 인간의 마음에 대해 설명해온 학자들의 이론 흐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학설이 인류학, 철학 등 사회과학 분야의 주류였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지과학, 신경학, 행동 유전학, 진화 심리학이 빈 서판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인지과학에 의하면 환경이 빈 서판에 무엇인가를 새겨넣는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빈 서판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서판에 새겨진 무엇인가가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을 다른 때에 학습한 패턴들과 결합하고, 그 조합을 이용해 새로운 생각을 서판에 쓰고, 그 결과를 읽고 목표를 향해 행동을 이끌어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판에 새겨진 것들은 영원히 그 자리에 남게 된다. 이것을 로크는 오성(understanding)이라 설명했다. 오성은 희미하게 반짝이는 화소들의 파노라마가 아니라 사물들의 세계를 보는 어떤 것이고, 말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내용을 추론하는 어떤 것이고, 사람들의 행동을 움직이는 팔과 다리의 궤적으로서가 아니라 목표 성취를 위한 시도로서 해석하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경학에서는 정신분열증의 유전적 증거로 일란성 쌍둥이의 정신분열증 사례를 증거로 들었다. 또한 철도 노동자 피니어스 게이지 사례를 이용하면서 뇌의 구조적 변화가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사고 나기 전과 다른 성격의 사람이 되어버린 사례도 들었다. 여기까지 보면 인간의 마음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유전자에 의해 선천적으로 모두 결정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행동 유전학의 설명을 들어보면 달라진다.


    행동 유전학에서는 유전자의 작은 차이가 행동상의 큰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 작은 차이는 여러 뇌 부위의 크기와 형태, 배선,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하고 연결하고 재처리하는 나노 기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특성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유전자를 찾는 노력이 실패해도 일란성 쌍둥이에 대한 연구는 유전자가 마음에 대한 가장 영향력있는 요소 중의 하나임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유전자가 우리 마음의 세세한 것까지 결정할 것이라는 불안은 두가지 사실에 의해 해소될 수 있다. 먼저 첫번째로 유전자의 영향은 대부분 확률적이다. 일란성 쌍둥이 중에서 한 명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다른 한 명이 그 특성을 가질 확률은 보통 절반이다. 두번째는 유전자의 영향이 환경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 다른 종의 옥수수들이 같은 밭에서 자랄 경우 유전자 때문에 옥수수들의 높이가 다를 것이고 같은 종의 옥수수가 다른 밭에서 자랄 경우 환경 때문에 높이가 다양할 것이다.


    빈 서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문화에 대해서 핑거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첫번째 문화는 중요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학습은 의도와 같은 모방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이 능력을 인지과학자들은 직관 심리, 통속 심리 또는 마음 이론이라고 불렀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흉내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사람이 모방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의 심리적 사건이 문화로 바뀌는 이유를 댄 슈페르버가 ‘유행병(epidemiology)’로 설명했다. 다른 사람의 성과를 받아들이는 인간 성향이 개인적 심리에서 집단적 문화로 바뀔 수 있었고 이것은 마치 유행병, 들불, 눈덩이 등과 비슷하게 보여진다. 그 외에도 스티븐 핑거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컴퓨터 신경망의 연결주의, 신경 가소성을 반박하지만 결국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과학, 뇌, 유전자, 진화 등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설명되는 가가 아니라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스티븐 핑거의 약 800여쪽에 이르는 글을 전부 다 읽지 않아도 사실 알고 있다. 인간의 심리적 특성은 선천적이라는 것을. 학창시절만해도 공부하면서 절절히 깨달았다. 같은 학교, 같은 학원을 다니고 같은 시간을 보내도 개개인의 학업적 성취는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뇌 가소성 이론에 심취하여 개인의 성취가 좋지 못한 것은 좋은 교육 환경을 받지 못한 탓이라 생각해왔다. 또한 개인의 성취가 선천적으로 타고나 개인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그토록 고통스러운 노력을 해야 할 당위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인간 본성을 애써 무의식 수준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한 말이 있다. ‘신기한 역설은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할 때 내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칼 로저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인간중심 접근 이론을 설립한 심리학자이므로 스티븐 핑거와 반대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인용한 이유는 스티븐 핑거의 궁극적인 목표와 같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 자신의 한계를 거부하거나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직면하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뚜렷이 객관화할 수 있고 문제도 해결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도덕적이고 낭만적이며 사회적으로 수용가능한 빈 서판 이론이 인류에게 옳은 것이라고 눈과 귀를 막지 말고 인간 본성을,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여야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들과 앞으로의 해결책들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빈 서판을 읽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 이미 앞에서 계속 언급한 것과 같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은 개인의 어떤 노력이나 환경적인 요인으로 어쩔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변화 불가능한 것에 매달려 시간과 노력의 재화를 소비하는 것보다 내가 가진 자원을 더 잘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고 본다. 단기적로 볼 때는 유전적인 성취도의 편차가 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장기적인 무한의 개념으로 볼 때 종국에는 그 차이가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과연 스티븐 핑거의 빈 서판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8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내용을 약 일주일에 걸쳐 읽고 있지만 로크가 말하는 ‘오성(understanding)’을 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쉽지 않은 내용이였고 심리학과 뇌과학 이외에도 언어학과 기타 사회분야의 용어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읽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설사 잘못 이해했더라도 이러한 고군분투가 개인적으로는 유익한 경험이였다. 첫번째로는 800여쪽에 이르는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과연 내가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주의에 잡혀있었다. 비록 다른 사람보다 읽는 속도도 느리고 품도 많이 들었지만 결국에는 해냈다. 작지만 큰 성취를 해냄으로써 개인 업적에 큰 첫 발자취를 남긴 느낌이다. 두번째로는 마음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의 변화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자유의지가 주는 자유로움과 희망에 취해 인간 본성을 애써 무시했는데 이는 자기 착취를 낳는 결과물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결국 나는 이번 경험도 또다시 심리학적 지식에 회귀함을 느꼈다.





- 스티븐 핑거 '빈 서판' 기록 

(2020.06.09 ~ 2020.06.14)





조회 8회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기술적 특이점

특이점이란 개념은 수학, 물리학에서 존재하는 개념이다. 1. 특이점(singularity) - 수학: 분수의 분모가 제로에 근접함에 따라 무한대로 발산되는 지점 - 물리학: 광속도로 이동하는 빛조차도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의 경계에 존재하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 2. 기술적 특이점 - 영국 옥스포드 사전에 정의된 특이점이란 “인공지능을

© 2020 by IMGURU, Inc. All rights reserved.